이 글도 올리지 못할 뻔 했다. 도파민에 대해서 좀더 정확한 이론을 알아보다보니 내가 쓴 이론의 근거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은 뇌과학 이론이 포인트가 아니다. 그래서 완벽함의 늪에서 빠져나와 그냥 올리기로 했다.
결국 올리지 못한 글들
지나가는 생각들이나 경험들을 기록하는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완벽하지 않은 글이라도 그냥 올리기로 종종 결심하지만 막상 그냥 올리려고 하면 수많은 고민이 든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이상하게도 여러가지 “늪”에 빠진다. 늪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나오고보면 일상의 다른 중요한 일들을 하느라 결국 그 글은 올리지 못하고 지나가버리게 된다.
- 흥미로운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점점 주제가 방대해져서 나도 모르게 “ㅇㅇ의 모든것”을 다루고 있는 주제 확장의 늪.
- 틀리면 어떡하지? 라는 두려움에 끊임없이 팩트를 체크하는 사실 검증의 늪.
- 좀더 좋은 글을 위해 표현을 고치고, 실험 코드를 짜려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흥미 상실의 늪.
이렇게 결국 릴리즈 되지 못한 블로그 글 초안들이 쌓여간다.
개선을 해보자
“글을 왜 못 올릴까?” “어떻게 글을 올리게 만들까??”
글을 올리는게 왜 중요한지 다시 되새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런 되새김은 이전에도 계속 해왔다. 최근 뇌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행동을 개선하는 전략을 많이 접하면서 인상깊게 본 영상이 있었는데, 비슷한 방식으로 접근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뇌과학적 관점에서 원인을 찾아보고 실제로 행동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해보자.
글을 못 올렸던 뇌과학적인 이유
1. 인지 과부하
전두엽의 전전두피질(Prefrontal Cortex, PFC)은 뇌에서 “실행 관리자” 역할을 한다. 여러 생각 중에서 어떤 행동을 할지 선택하고, 계획하고, 통제하는 역할이다.
문제는 이러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정보를 동시에 인지하고 처리해야 하는데, 이 부분의 처리 용량이 생각보다 작다는 것이다.
반면에 글을 쓸 때 내 뇌가 동시에 처리하려는 것들은 많다. 글 전체 구조 설계, 문장 다듬기, 사실 검증 등. 뿐만 아니라 다른 주제로 튀지 않게 억제하기, 이 글이 별로일까봐 걱정하는 불안감을 관리하는 일까지 모두 뇌가 동시에 처리하는 일이다.
마치 RAM이 4GB인 컴퓨터에서 Chrome 탭 30개를 동시에 열면서 렉이 걸리는 것과 같다. 전전두엽이 과부하되면 실행 기능이 마비되고, 뇌는 가장 편한 선택을 한다. 그게 바로 “회피”
“나중에 하지 뭐” 하고 넘겨 버리는 것이다.
2. 도파민의 열정은 빨리 식는다.
(참고) 실제로는 다양한 이론과 근거로 분리해서 설명해야 하는 문제들이 이 글에서는 섞여있다.
하지만 이 글은 뇌과학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자세하게 이론과 근거를 논하는 것은 넘어가기로 했다.
시간 할인(Temporal Discounting), Reward Prediction Error(보상 예측 오류), Dopamine decay (도파민 신호의 휘발성) 같은 이론들을 참고로 했다.
글감을 처음 떠올릴 때면 미묘하게 짜릿한 느낌이 있는데 바로 도파민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글을 쓰려는 동기를 유발하는 것, 글을 다 쓰면 받는 만족감 같은 것도 도파민의 영향을 받는다.
문제는 도파민이 계속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파민은 단순히 기분이 좋다고 분비되는 게 아니라, 보상이 “예상보다 좋았는지”를 비교해서 분비된다.
글쓰기를 예로 들면 아래와 같다.
-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이 주제로 글 쓰면 좋겠다!” → 예상 보상이 급상승
- 글을 실제로 써보면 생각보다 어려움 → 실제 보상 < 예상 보상 → 도파민 감소
- 뇌가 이 경험을 학습하여 비슷한 주제는 신중하게 접근하게 됨.
“잘 모르는 주제”에 끌리지만 결국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불확실성은 도파민 기대치를 높여서 예상 보상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알아내고 글로 써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 사이 도파민에 대한 기대감이 줄어들고, 글을 완성할 가능성은 점점 낮아진다.
3. 목표 희석 효과 - 주제가 계속 변하는 이유.
“React useEffect 정리”를 쓰려고 시작했는데, 어느새 “React 생명주기 전체”, “클래스형 vs 함수형 컴포넌트 비교”, “상태 관리 패턴”, “성능 최적화”를 모두 다루려고 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목표 희석 효과(Goal Dilution) 와 DMN(Default Mode Network, DMN) 과활성 으로 설명할 수 있다.
DMN은 “아무것도 안 할 때” 활성화되는 뇌 네트워크다. 멍때릴 때나 샤워할 때 활성화되면서 자유 연상을 한다. 창의적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긍정적 역할도 하지만, 글쓰기 중에 과도하게 활성화되면 새로운 주제를 계속 연상하게 되면서 문제가 된다.
A 주제를 쓰다가 → B가 떠오르고 → C도 관련 있고 → D도 써야 할 것 같고… 인지적 억제 조절이 실패하면서 초점이 흐려진다. 결국 “ㅇㅇ에 대한 총정리”를 쓰려다가 완성하지 못한다.
4. 무한 사실 검증은 편도체의 과활성의 결과.
“이 내용이 정확한가?” 하는 검증은 끝이 없다.
React 공식 문서를 읽고, GitHub 이슈를 뒤지고, Chat GPT에 질문하고, 실제로 실행을 통해 검증해보고, 다른 블로그 글들과 비교하고… 이렇게 한 문단 쓰는 데 며칠이 걸린다.
이런 완벽주의는 편도체의 과활성과 관련이 있다. “틀린 정보를 올리면 어떡하지?” “사람들이 비판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이 검증 강박으로 이어진다. (편도체는 불안을 관리하는 뇌 부위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기술 분야에서 “100% 정확한 설명”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버전이 바뀌고, 구현이 달라지고, 컨텍스트가 다르면 답도 달라진다. 완벽을 추구하다 보면 영원히 발행 버튼을 누를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 실천 가능한 4가지 전략
뇌과학적 원인을 알았으니, 이제 뇌의 작동 방식을 역이용해보자. 실천 가능한 4가지 전략이다.
1. 글쓰기 단계 분할하기
한 번에 모든 걸 하려니까 인지부하가 생긴다면, 단계를 분리하여 인지부하를 분산시키자.
예를들면 이런식이다. 각 세부단계에서는 진행죽인 단계에만 집중하자.
# 5단계 글쓰기 프로세스:
- 1단계: 브레인 덤프 - 처음 생각난 글감에 대해서 자유롭게 써본다.
- 2단계: 주제 고정 - 이때 정한 주제를 유지한다.
- 3단계: 뼈대 잡기 - 세부 내용이 아닌 글의 뼈대만 잡아본다.
- 4단계: 세부내용 작성 - 한 섹션씩 작성한다.
- 5단게: 사실 검증
2. 도파민 활용: 임팩트를 느끼는 즉시 기록한다.
도파민이 분비되는 순간이 골든 타임이다. 3일 후가 아니라 동기가 떠올랐을 때 바로 그 순간 기록해야 한다.
이건 글이 아니다. 단지 임팩트를 보존하는 메모이다. 나중에 이 메모를 보면 그때의 흥미가 일부나마 되살아난다.
스마트폰 메모나 음성 녹음을 통해서 기록할 수 있다.
3. 주제 확산 차단: 백로그 시스템
글을 쓰다가 다른 주제가 떠오르는 건 DMN의 자연스러운 작동이기 때문에 억지로 막을 수 없다. 떠오르는 주제를 처리하지 않으면 머리에서 계속 맴돌면서 인지에 부하를 줄 것이다.
떠오르는 주제를 적절히 처리하자.
📁 백로그/
├─ TypeScript 제네릭 고급 패턴 정리.md
├─ Next.js 13 App Router 마이그레이션 경험.md
├─ 브라우저 렌더링 파이프라인 깊게 파기.md
└─ 함수형 프로그래밍 실전 적용기.md
글을 쓰다가 “아, 이것도 써야지!” 하는 생각이 들면 백로그를 생성하고 다시 현재 글로 돌아오자.
이렇게 하면 뇌는 “기록했으니 됐다”며 안심한다. 자이가르니크 효과(미완성 과제에 대한 긴장) 가 외부화되면서 작업 기억이 해방되는 것이다.
4. 완벽주의 무력화: 범위를 명확히 하기
완벽한 글은 없다. 대신 명확한 범위의 글은 있다.
# [주제]
⚠️ 이 글의 범위
- 이 글은 [구체적 상황]에서 제가 경험한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 [전체 주제]를 다루지 않습니다
- [버전/환경] 기준입니다
이렇게 범위를 먼저 밝히면:
- 독자 기대치가 조정된다
- “불완전함”을 솔직히 말하면 오히려 신뢰도가 올라간다
- 심리적 부담이 확 줄어든다
그리고 “경험 기록”으로 프레이밍하면 검증 부담이 거의 사라진다.
진짜 현실적인 고민들
전략을 세웠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다. 실제로 적용하려니 또 다른 고민이 생긴다.
고민 1: 날것만 계속 쌓이면 어떡하지?
먼저 쌓이는 아이디어를 어느정도는 통제할 필요가 있다. 글감을 관리할 때 작성중인 글의 개수를 제한하자. 그리고 일정 시간 내에는 릴리즈하자.
글감 통제하기
작성중 최대 5개까지만 허용
새로운 메모 만들려면 기존 것 하나 발행 or 삭제
이렇게 정하면 강제로 우선순위를 결정하게 만든다. “나중에”의 무한 확장을 막는다.
Staled 시스템: 7일동안 방치한 글은 사실상 안쓰게 된다.
파일명: 2025-10-30-react-concurrent.md
부패일: 2025-11-06 (7일 후)
→ 7일 후에도 안 쓴 메모는 자동 알림
→ 발행 하거나, Staled 폴더로 이동 결정
최종적으로 폴더 구조는 이렇게 된다.
/블로그
/백로그
/작성중
/발행됨
/Staled
7일 후에도 안 쓴 글은 사실상 안 쓴다. 그냥 삭제하면 더이상 생각나지 않을것이다.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 애초에 “발행 기준”을 낮추기
메모를 애초에 쌓이지 않게 하려면? 5-10분 만에 쓸 수 있는 형태로 바로 발행하면 된다. 짧은 글이 많아질 수도 있는데 상관없다.
고민 2: 내가 모른다는 걸 공개하는 게 두렵다
블로그는 공개 플랫폼이고, “전문성”에 대한 압박이 있다.
“이걸 모른다고?? 이 개념을 이제 알았다고??” 초보자로 보이지 않을까?
부정적 편향(Negativity Bias)
편도체가 사회적 평가 위협을 감지하면 회피 반응을 일으킨다. 문제는 뇌가 부정적 피드백을 실제 확률보다 5-10배 과대평가한다는 것이다.
실제 데이터:
- 가장 인기 있는 개발 블로그들은 배운 것을 기록하는 스타일
- 댓글 톤은 대부분 긍정적 또는 정보 추가나 내용에 대한 질문이다.
- 비판적 댓글: 극소수이며 무시 가능
현실적 해결책 3가지:
A. 주제를 “경험”으로 프레이밍
❌ "React 18 완벽 가이드"
✅ "프로젝트 업데이트하면서 마주친 React 18 이슈 3가지"
→ 경험은 틀릴 수 없다
→ 검증 불필요
B. “질문형” 글쓰기
질문으로 글을 시작해라. 모름을 솔직하게 말하는 게 오히려 호감도를 높인다.
그리고 때로는 통찰력 있는 의문이 더 좋은 생각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그래서 꼭 결론이 없더라도 질문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실패한 경험도 콘텐츠가 되기 때문에 완벽할 필요가 없다.
# 질문 형태의 주제
React 상태 업데이트가 비동기인 이유는 뭘까??
React의 useEffect를 조건부로 실행하면 안되는 이유는 뭘까?
webp는 jpg와 어떻게 다를까?
안되는 줄 알았는데 왜 될까?
나는 왜 글을 쓰지 못할까?
C. “시리즈물” 전략
문제 발견과 실험 결과를 시리즈로 나누는 것이다.
의문을 발견하고 실험과 리서치를 통해 결론을 도출하기까지 오래걸리는 경우가 많은데 의문 그 자체를 주제로 해서 먼저 릴리즈해도 된다.
# Next.js 성능 개선기 #1 - 문제 발견
- 문제를 발견한 배경
- 어떤것들을 시도해보면 좋을지?
# Next.js 성능 개선기 #2 - 실험 결과
-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도해본것
- 문제를 해결한 방법
완벽하지 않아도 그냥 올리자
이 모든 탐구의 결론을 심플하게 말하면 결국 “완벽하지 않아도 그냥 올리자.”는 것이다.
뇌는 완벽을 추구하도록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에 뇌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작동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완벽한 글 1개를 쓰려다 포기하는 것보다, 모자란 완성도의 글 10개를 쓰는 게 낫다.
그 10개가 쌓이면 패턴이 보이고, 글쓰기 신경 회로가 강화되고, 어느새 “잘 쓰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